[레14:21, 새번역] 그러나 가난해서 그렇게 많은 것을 바칠 수 없는 사람이, 자기의 죄를 속하려 할 때에는, 그는, 제사장이 흔들어 바칠 속건제물로는 숫양 한 마리를 가져 오고, 곡식제물로 바칠 기름으로 반죽한 고운 밀가루는 십분의 일 에바만 가져 오면 된다. 기름은 마찬가지로 한 록이다.
사실 레위기의 정결법을 현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우리는 레위기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다른 종교들 처럼 미신적인 행위를 요구하실리가 없고 뭔가 거룩하고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지나친 해석을 통해 억지로 영적인 것처럼 끼워맞추는 듯한 모습들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을 관리하는 정결법과 제사에 관한 내용들은
21세기의 사람들이 받아드리기엔 불편한 구석이 한두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의학적 기반이 전혀 없었던 고대시대에 질병들로 부터 이겨내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과 그들의 노력이 대단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악성 피부병에 걸린 사람이 이제 깨끗해졌다고 인정받기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절차가 필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21절에는 가난해서 바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제물의 부담을 주려주지만 그래도 속건제물로는 숫양 한 마리를 가져오라는 말씀을 하시고 있습니다.
가난한데다 그동안 격리되어 생활도 쉽지 않았을텐데
굳이 숫양 한 마리를 요구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속건제는 배상에 대한 속죄입니다. 부지중에 하나님의 것을 함부로 하거나 성물을 함부로 했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런 병에 걸린 이유가 아마도 내가 부지 중에 그런 죄를 지어서가 아닌가 되돌아보며 속건제에 참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가난한 사람이라도 숫양 한 마리를 꼭 드려야 했던 것이죠.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제사를 드린 사람은 자신의 죄책감으로 부터 자유해 질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것을 함부로 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죄책감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값이 나가는 제물을 드림으로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더욱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단순한 처형방식이었다면 아마도 우리 죄의 심각성과 대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악성피부병에 걸렸던 사람에게 정죄하거나수군거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충분히 값을 치렀다고 생각하고 그를 위로하지 않았을까요?
의료기술이 전무했던 그 당시….
과정이 복잡하고 까다로울 수록 죄책감은 사라지고 치유에 대한 확신은 터 커지게 되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