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정결 (민수기 19장)

[민수기 19:11, 새번역] “어느 누구의 주검이든, 사람의 주검에 몸이 닿은 사람은 이레 동안 부정하다.

현대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죽음과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주변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꼭 동네의 한 두 곳에는 상가를 알리는 근조등이 달려있었습니다.
또 장례 행렬이 동네에서 이뤄지곤 했습니다.
(너무 옛날이야기인가요?)
그런데 그만큼 죽음과 일상이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오늘 말씀이 그리 체감이 안될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사진을 찾기도 힘들정도 였으니……

아마 근대화가 덜 이루어진 시골거리에서는 더 흔한 장면이었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동물들의 죽은 사체들도 자주 볼 수 있었겠죠.

죽음은 그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않은 일상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광야생활을 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더욱이 모든 사체는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말씀을 통해서도 봤지만 죽음은 정결함의 반대 의미가 컸습니다.
40년간의 광야생활은 사람이나 동물들의 사체를 처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겁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값비싼 제사를 드리지 않고도 그들을 정결하게 하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를 탄 물로 깨끗하게 했습니다.

일상에 노출되어있는 부정을(죄악)을 언제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더 만나시길 원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가 더 깊이 와닿았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14, 새번역]

바울은 매번 자신이 죽었다는 표현을 씁니다.
먼저는 예수님이 죽으셨고, 바울 자신도 이미 십지가에서 죽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에게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새창조 안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죽음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부정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부활의 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부정결”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완전한 정결”로 만드신 것입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탄 물이 이제 우리에게 십자가의 보혈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정결한 예배자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새창조 안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죽음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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